요즘 출시되는 스마트폰 사양표를 뒤적거리다 보면, ‘GLONASS’라는 단어가 심심찮게 눈에 띈다. GLONASS는 우리가 흔히 쓰는 위성항법장치인 GPS와 비슷한 기술이다. 위성 기반의 위치정보시스템의 대명사인 GPS는 세계 어디서나 쓸 수 있는 미국의 군사용 위성 기술이다. 미국은 1978년부터 24개의 위성과 3개의 보조 위성을 쏘아 올렸고 그 중 일부 기능을 축소해 민간에 무료로 공개했다. 실제 미군이 쓰는 군사용 GPS는 정확도가 더 높다.
현재 GPS는 전세계 스마트폰을 비롯해 내비게이션 등 거의 모든 장치에 들어가며 표준처럼 돼 버렸다. 흔히 내비게이션을 GPS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스테플러와 호치키스같은 관계다. 정확하게는 GNSS(Global Navigation Satellite System)라고 부르는 편이 맞다.
GPS는 편리하긴 하지만 국가들 입장에서는 예민한 부분이 하나 있다. 군사용이다. 미군이야 GPS 정보를 이용해 작전 위치나 미사일의 목표물 타격 등을 할 수 있지만 다른 국가들은 대부분 민간용 위성에만 접근할 수 있다. 게다가 미국과 전쟁을 벌이게 되면 미국이 GPS 위성을 끄거나 교란을 일으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불안감이 있었다.
그래서 러시아는 GLONASS 위성을 쏘아 올렸고 중국은 BeiDou, 일본도 QZSS를 갖고 있다. 유럽연합도 2005년부터 갈릴레오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강대국이라면 위치정보시스템 하나쯤은 갖춰야 하는 상황인 셈이다. 초기에 미국은 주파수 간섭 등을 이유로 반대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반대하는 이유가 정치적이라는 해석이 이뤄지면서 잠잠해지고 있다.
▲GPS와 GLONASS가 함께 적용된 ‘아이폰4S’와 GPS만 이용하는 ‘아이폰4′의 정확도는 큰 차이가 난다.☞유튜브에서 영상보기
GLONASS가 주목받는 이유는 지구 전체를 커버할 수 있는 위성이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전신인 소련에서 1982년 처음 위성을 쏘아 올렸고 1996년에 처음 완성됐다. 위치를 파악하려면 적어도 24개의 위성이 필요한데, 러시아의 어려운 경제상황 탓에 위성 발사와 유지보수가 지지부진했다. 비용 문제로 8개만 켜 둔적도 있었다. 2000년대 들어 인도 정부와 협력해 다시 위성을 쏘아올리고 위성들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2010년부터 상용화했고 스마트폰도 만들어졌지만, 아직은 생소하다
▲실시간 위성 추적 사이트들에서 GLONASS의 이동 궤적을 볼 수 있다. <관련 사이트 : N2YO>
이 GLONASS가 다시금 고개를 드는 이유는 스마트폰 시장에서 힘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에 나온 스마트폰들의 대부분은 GLONASS 위성 신호를 잡을 수 있다. 최근에 만나본 ‘넥서스4′, ‘엑스페리아Z’, ‘베가 넘버6′ 등에도 적용돼 있다. 이들 스마트폰은 더 정확한 위치 정보를 얻기 위해 GPS와 GLONASS를 병행해서 쓴다. GPS가 27개, GLONASS가 24개 위성을 갖고 있으니 이를 함께 활용하면 더 정확하게 위치를 측정할 수 있다.
이제 GLONASS를 원활하게 쓸 수 있게 되면서 가장 빨리 움직이는 곳은 칩셋 회사들이다. 퀄컴, 브로드컴, NXP 등이 내놓은 칩셋은 이미 GPS와 GLONASS 신호를 동시에 받을 수 있다. 일부 칩들은 QZSS, SBAS 등의 위성 신호까지 동시에 수신해 정확도를 높이기도 한다.
현재 GLONASS는 퀄컴 스냅드래곤 프로세서를 쓰는 스마트폰에는 대부분 들어가 있다. 애플도 아이폰4S부터 이미 GLONASS를 쓰고 있었다. GLONASS의 활용 방법은 GPS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아직 개별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고 대부분 GPS와 신호를 합쳐서 보강하거나 더 나은 신호를 받아들이는 등의 용도로 쓰인다.
▲GLONASS를 GPS와 함께 수신하는 넥서스4(왼쪽)와 GPS만 받는 넥서스S(오른쪽의 위성 수신 상태다. 미국 국기는 GPS로 부르는 나브스타 위성, 러시아 국기는 GLONASS다.
하지만 아직 이를 활용하기 위한 앱 개발사들의 움직임은 거의 없다. T맵을 서비스하는 SK플래닛은 “GLONASS에 대해 검토하고 있는 중이고 GPS와 병행하는 방법에 대해 준비중이지만, 아직 GLONASS를 비롯한 별도의 위성 신호에 대해 특별한 진행 상황은 없다”라고 밝혔다. 다른 앱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실상 앱 개발자들이 직접 GLONASS를 위해 따로 뭔가 추가할 필요 없이 칩 단위에서 위성 신호를 모두 처리해주기 때문이다.
초기 GLONASS 수신칩들은 위치정보를 GPS와 별개의 신호로 제공했는데, 최근들어 수신칩들이 GPS와 GLONASS를 동시에 받고 두 시스템의 측량 정보를 합쳐 보간한 뒤 운영체제와 응용프로그램에 데이터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 업계의 설명이다. 멀티 수신칩을 만드는 브로드컴의 관계자는 “기존에 위치 정보를 불러오는 절차만으로 이미 두 위성 신호가 합쳐진 정밀한 결과를 제공한다”라며 “앱 개발자들은 따로 신경쓰지 않아도 GLONASS를 함께 수신할 수 있는 스마트폰에서는 더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다”고 설명한다.
무선랜과 기지국 신호를 위성 신호와 함께 받아 위치를 보간하는 A-GPS는 응용프로그램에서 두 신호를 각각 수집해 위치를 결정하지만, GPS와 GLONASS의 관계는 칩 자체가 이미 두 위성항법시스템의 신호를 처리해 하나의 데이터를 넘겨준다고 보면 된다. 통합칩을 갖고 있는 스마트폰에서는 이미 ‘구글지도’, ‘T맵’, ‘김기사’ 등의 앱에서 GLONASS 데이터가 반영된 정보를 이용하고 있는 셈이다
브로드컴은 GPS, GLONASS 등을 합쳐 정밀하게 위치를 파악하고 특정 지역에 진입하거나 벗어날 경우 이를 경고해주는 지오펜스 등의 기술을 선보이기도 했다. 통합칩 제조사인 NXP 쪽은 “GLONASS는 당장 자동차 산업에 꼭 필요한 기술”이라고 말한다. 러시아는 2015년부터 판매되는 차량에 GLONASS 기반의 응급 상황 알림 기능을 의무화하려는 움직임이 있기 때문이다. 유럽 자동차의 eCall과 비슷한 기능으로 심각한 사고가 나면 위치정보를 응급 기관에 스스로 보고한다. NXP 쪽은 “러시아에 수출하는 차들에는 시장이 요구하는 기초적인 안전 요건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NXP 외에도 여러 텔레매틱스 관련 기업들이 이 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한국이 참여하는 유럽의 갈릴레오 프로젝트는 비용과 기술 문제로 2011년에서야 첫 위성을 쏘아 올렸고 2015년께나 쓸 수 있게 될 전망이다. 중국도 현재 중국만 커버하는 BeiDou를 확대해 세계 어디서나 위치를 측정할 수 있도록 하는 ‘컴파스(Compass)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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